[이 藥] "독립운동 활명수, 매일 역사를 새로 쓰다"
- 이탁순
- 2015-08-13 06: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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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양약으로 제조·유통 획 그어...광복 70주년 격동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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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독립운동 집안 동화약품 활명수 이야기]

대한제국 원년부터 지금까지 118년을 산 활명수는 우리나라 약계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활명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양약이 등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중화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를 개발하고,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그의 아들 민강(동화약품 초대사장)과 함께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하면서 활명수의 역사는 물론 대한민국 제약의 역사도 시작됐다.
초창기 가내수공업적인 생산체제에서 생산되던 활명수는 이제 전자동 액제 생산라인에서 연간 1억병이 생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판매된 활명수는 84억병에 달하며, 이를 길이로 환산하면 지구를 25바퀴나 돌 수 있는 양이다.
활명수가 개발될 당시에는 약이라고는 달여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기였다. 약을 구하기 힘들어 급체, 토사곽란에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민병호 선생이 활명수를 제일 먼저 개발한 것도 소화불량이 가장 흔하면서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으면서도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는 그 이름처럼 ‘생명을 살리는 물’로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제조회사 설립 최초 브랜드...약방 활성화에 기여
침술과 한약에만 의존하던 우리 의약계에 활명수는 새 바람을 일으켰다. 현호색, 창출, 진피, 후박 같은 전통 한약재에 아선약과 정향 등의 수입 약재를 배합한 활명수는 특유의 효능과 편리함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제조 회사 설립을 통해 브랜드를 갖고 판매된 최초의 제품으로 대한민국 제약업과 브랜드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동화약방이 창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0년대에 약방들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동화의 창업과 활명수의 개발이 제약업이라는 산업군을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의 도매상에 해당하는 판매소를 통해서만 제품을 판매해 중간 상인 등 유통을 담당하는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서며 상생을 도모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혼으로...판매금액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
일제 강점기라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동화약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자 승전보를 알리는 축하 광고를 이틀후인 11일 일간지에 게재했다. 당시 광고에서 조선 청년의 의기충천(意氣衝天)을 알려, 암울한 시대에 국민들의 자부심을 북돋았다.
당시 동화약방은 민강 사장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경영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체력의 근원이 건전한 위장이며 이를 위해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게재한 것은 동화약품의 남다른 민족 정신을 보여준다.

동화약품 민족정신은 초대 사장 민강 선생(1883~1931)부터 발현됐다. 민강 선생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연락을 위해 만들어진 비밀단체 '서울연통부' 행정책임자로 국내외 연락 및 정보 활동을 담당했다. 당시 활명수 판매금액을 독립운동가의 활동자금을 지원하는데 힘썼다.
5대 사장 보당 윤창식 선생(1890~1963)은 '조선산직장려계', '신간회' 등 조선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제약업계 최악의 시기였던 40년대에도 침체한 활명수 시장회복 및 만주국 진출 등 사세확장의 업적을 세웠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윤창식 사장의 경영철학은 후대 경영자들에게도 이어져 현재까지 동화약품 경영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윤광열 명예회장(1924~2010)은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재학시절, 자발적으로 중국 상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 
동화약품은 한국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주력제품인 활명수의 영업에 힘쓰고, 다양한 신제품을 꾸준히 발매해 매출을 증대시켜 1960년대에도 승승장구해나갔다.
이때 생각지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바로 탄산을 삽입한 까스명수가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것이다. 당시에는 동화약품은 무조건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침착하게 까스활명수를 개발해 경쟁 상황을 역전시켰다.
또 발포성 소화제 시장의 규모를 확대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까스활명수는 높은 브랜드 가치를 토대로 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것은 물론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놀라운 결단력을 보여줬다.
'부채표 캠페인'으로 브랜드 차별화에 나서며, 소비자의 신뢰를 강화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발매 초기인 1910년대부터 각종 유사품에 시달렸던 활명수는 1990년 중반부터 '부채표 캠페인'으로 브랜드 차별화에 나섰다. 이를 통해 소비자 신뢰를 강화하고, 소화제 대표브랜드로서의 입지까지 확고히 했다.
최근 활명수는 탄산 첨가, 성분 보강, 무보존제 제품 출시, 프락토올리고당 함유 등 지속해서 진화를 추구해왔다. 한국 사람의 변화된 라이프 스타일에 적합한 변화로 한결같이 소비자의 사랑을 얻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복잡한 여성의 소화불량을 위한 '미인 활명수'를 출시했다. 오매(매실을 훈증한 생약)를 첨가해 정장 기능까지 더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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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心 겨냥한 '미인활명수' 본격 발매
2015-07-16 10: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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