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사를 찾으시나요?
닫기
2025-12-22 06:00:08 기준
  • #제품
  • 허가
  • 약국 약사
  • #제약
  • 글로벌
  • 의약품
  • #염
  • GC
  • 유통
  • AI

[기자의 눈] 그 회사에도 '데이빗님'이 계신가요

  • 안경진
  • 2021-07-28 06:10:35

[데일리팜=안경진 기자]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자료는 내일까지 정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최근 바이오벤처 취재가 부쩍 늘어난 탓일까. 몇년 전 재밌게 읽었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의 등장인물 '데이빗'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데이빗은 '우동마켓'이라는 가상의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 서비스하는 판교 소재 스타트업의 대표다. 우동마켓 직원들은 상호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데이빗의 뜻에 따라 직급 호칭 없이 영어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빗을 포함한 이사급 임원들과 대화할 때에는 영어이름 뒤에 '~님', '~께서'와 같이 어울리지 않는 극존칭 표현이 붙는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다.

소설에는 매일 아침 우동마켓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스크럼도 소재로 등장한다. 스크럼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관리기법의 일종이다. 약속된 시간에 모여 서서 각자 맡은 분야를 짧게 이야기하고 진행상황을 점검하자는 취지였지만, 우동마켓에서는 데이빗 혼자 20분 넘게 훈계를 늘어놓는 아침조회 시간으로 변질되고 만다.

소설을 쓴 장류진 작가는 판교 소재 IT 회사에서 기획자로 근무했던 직·간접 경험을 녹여냈다고 한다. 판교에서 근무 중인 지인들의 얘기를 종합해 봐도 현실과 영 동떨어진 얘기만은 아닌듯 싶다.

어디 소설 뿐일까. 현실에서도 많은 국내 기업들이 수평적이고 창의적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데 힘쓰고 있다. 조직문화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전통 제약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웅제약은 이미 4년 전부터 전 직원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대외적 직함이 부장, 차장이라도 사내에서는 모두 '~님'이라 불린다. 자율복장제를 채택하는 제약사들도 부쩍 늘었다. 동아쏘시오홀딩스는 2017년 업계 최초로 '캐주얼데이'를 도입한 데 이어 전 임직원 대상 자율복장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롭고 편안한 복장을 통해 유연한 근무 환경을 조성하고 업무 효율을 증대하려는 취지다. 동아쏘시오홀딩스를 비롯해 동아에스티, 동아제약 등 동아쏘시오그룹 임직원은 복장에 대한 특별한 규정없이 TPO(시간·장소·상황)에 맞게 업무 효율을 높이는 자율복장으로 근무하면 된다.

고정된 좌석, 출퇴근 시간을 없애고 자율화하는 제약·바이오기업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갑작스럽게 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재택근무, 비대면 회의와 같은 근무행태 변화마저 부추기고 있다.

호칭, 복장, 근무시간 등 기존 형식을 벗어나려는 경영진들의 노력은 바람직한 변화로 받아들여진다. 수평적 조직문화는 기업의 혁신과 창의성을 끌어내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게 한다. 궁극적으로는 직원들의 성취도를 높이고 조직을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단 간과해선 안될 사실이 있다. 호칭 파괴는 시작일 뿐,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급을 없앤 모든 기업이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혁신을 이루진 못한다. 영어이름이나 자율복장이 수평적인 조직화를 위한 필요조건일지는 모르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실리콘밸리의 IT기업들은 이미 20년 전부터 나이, 직급, 연차와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직원들은 자신의 관점과 생각을 투명하게 밝히고, 철저하게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 관리자들 역시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실리콘밸리와 같이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재현하기까지는 더욱 오랜 인내와 노력이 투입돼야 할 것이다. 단순히 직급을 없애거나 영어이름을 부르는 식으로 흉내만 낸다면 업계 곳곳에 수많은 '데이빗님'을 양산하는 데 그칠 것이 자명하다. 앞다퉈 바이오벤처로 향하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의 발걸음을 돌릴 수 있는 비결도 어쩌면 같은 고민으로 해결될지 모른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 해주세요.
  • 댓글 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운영규칙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