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 희망"…해방둥이 두 장수 제약기업
- 가인호
- 2015-08-13 06: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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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창업 대웅제약-JW중외제약, 제약산업 발전 이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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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업들은 광복 직후 산업 토대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초기 기업의 형태를 만들었고 대한민국 경제와 맥을 함께하며 성장했다.
그 주인공은 필수의약품 수액제 국산화를 통해 국민건강과 보건주권에 이바지한 #JW중외그룹과 선화약국을 모태로 현재 글로벌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는 #대웅제약이다.
이 두 기업은 해방 직후 기반시설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남다른 기업가 정신을 통해 국내제약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자생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해방둥이자 장수기업인 두 곳의 히스토리를 살펴본다.
[대웅제약]
◆선화약국에서 대한비타민사까지=대웅제약의 모체는 부산 수정동 경남여고 앞에 있던 '선화약국’이다.

많은 공부와 노력을 통한 차별화를 통해 약국의 매출은 연일 대박이 났고, 윤 명예회장은 기업이라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했다.
1966년 평소 약품 관계로 윤 명예회장과 알고 지내던 대한비타민사의 박문수 사장이 제약회사의 인수를 제안했다.
윤 명예회장은 자신의 생각과 맞물린 제의에 인수 결정에 주저가 없었고, 전액 1억 2000만원 중 현금 6000만원에 공장과 기계, 원료 일체를 인수받고 나머지는 1년 내 지불하는 조건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대한비타민이라는 회사를 인수한 윤 명예회장은 회사에 뿌리내린 고질적인 병폐와 부실 기업의 흔적 등을 고치기 위해 편법 없이 정도를 걷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또한 원료 입고에서부터 생산과정, 영업사원들의 판매 장애요인 그리고 세일즈 테크닉 등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1966년 인수 당시 업계 34위이던 대한비타민사는 67년 24위, 68년 19위, 69년 16위, 70년 상반기에는 12위까지, 말 그대로 매년 60%가 넘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일류제약사를 위한 서울 진출=하지만 정의와 노력의 산물로 거뒀던 성장에도 한계가 나타났다. 바로 부산이라는 입지적 여건의 한계였다. 당시 부산은 서울에 비해 유능한 인재와 양질의 원자재 확보, 경영정보 및 의약기술정보 수집 등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 명예회장은 과감히 서울로의 진출을 감행했다.

또한 1973년에는 제약업계에서는 네 번째로 과감히 기업공개를 단행했고 우리사주조합도 발족시켰다.
성남 진출 3년 후인 1975년에는 서울 중구 동자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사옥도 마련했다. 1981년 서초동 사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회사의 모든 주요 업무는 이곳에서 싹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웅제약으로 첫발, 우루사와 함께 열다=1974년에는 새로운 제품 개발과 기존 제품의 개선을 위해 부설 제약연구소를 설립했다. 부설 제약연구소에서 독자적인 원료합성개발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대중약 중심의 제품 구조를 병원 약품 중심으로 변경해 나갔다.
이 때 대웅제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웅담성분 간장약 ‘우루사’가 탄생했다. 당시 간장약 시장은 이미 다른 업체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 명예회장은 타사의 제품들과는 차별화될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함을 인지했고, 그 순간 최고의 약효를 낸다는 웅담을 생각해냈다. 예로부터 간장질환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웅담을 어떻게 약효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탄생한 약이 바로 우루사였다.
'웅담성분 간장약' 우루사는 61년 정제로 발매된 이후 74년 세계 최초로 연질 캅셀화, 77년 연질 캅셀 자동 생산화 등으로 품질과 효능이 향상됐다. 1974년 1억원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이 제품은 85년에는 무려 1백27억 의 매출을 올렸고, 90년에는 200억원에 이르렀다.
10년간 100배 성장.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우루사로 대웅제약은 80년대 중반 제약업계 10위권 진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실로 센세이션이라 할 수 있는 결과였다.
◆대웅제약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어느 날부턴가 윤 명예회장은 회사 이름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1978년 2월, 드디어 대한비타민사 창립 33주년을 맞아 대한비타민의 '대'자와 우루사에서 영감을 받은 '웅'자를 합쳐 대웅제약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재탄생했다.
대웅제약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한 노력에도 최선을 다했다. 1982년에는 다국적 기업인 미국의 일라이 릴리사와 합작계약을 체결해 대웅릴리를 설립했으며, 1983년에는 세계 제일의 연질캅셀 회사인 미국알피쉐러사와 50대50 합작비율로 한국알피쉐러를 설립, 이를 통해 선진 기술을 공유할 수 있었다.
1988년 2월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 배합신약 종합 소화제 베아제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특허도 획득했다. 67년부터 개발을 시작하였지만 원료 단독 공급을 계약했던 일본 제약사와의 트러블, 갑작스러운 약사법 개정 등으로 베아제의 개발에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대웅제약이 자체적으로 제대로 된 소화제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윤 회장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베아제는 제품 발매 몇 해만에 200억이 넘는 매출을 올렸으며, 대웅제약이 종합제약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신약개발, 그리고 글로벌 대웅으로 도약=대웅제약은 88년 삼성동으로 본사 사옥 이전, 89년 대웅경영개발원 개원 등 사업 규모를 점차 확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1990년 이후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했다. 선진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신약물질의 개발과 기업운영 전반의 정보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좋은 약과 원활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대웅제약은 먼저 신약개발에 몰두했다. 그 노력의 최초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국내 바이오 신약 1호인 ‘이지에프’였다.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제인 이지에프는 1988년부터 약 13년간 연구, 개발, 임상시험 끝에 순수 국내 생명공학 기술로 얻어진 값진 결과였다.

2012년에는 지식경제부로부터 글로벌 기업 육성 프로젝트인 월드클래스300선정기업에 지정돼 신약개발과 해외 진출 등에서 원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상호 협력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2013년에는 중국의 제약회사 바이펑을 인수해 2017년 말까지 중국 심양에 제약공장을 완공하고 2018년부터 세파계 항생제와 내용액제 완제품 등을 직접 생산 및 판매를 계획하고 있다. 대웅제약은 앞으로도 국가별 생산거점 확보를 통해 중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각 진출국가에서 넘버10 안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JW중외그룹]
1945년 '조선중외제약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JW중외그룹은 8년 만인 1953년 '대한중외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현대적 기업 형태를 갖추고, 1958년 의료현장의 요청으로 수액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 때만 해도 국내에는 수액을 생산하는 업체도 없었거니와 의사들조차 수액요법을 잘 아는 이가 드물었다.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수액은 크게 약액과 유리병, 고무마개가 결합된 단순한 구조였지만 이 모두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은 힘든 과정이었다.
JW중외그룹은 이런 어려움을 하나씩 극복하며 1959년 10월 마침내 '5% 포도당' 수액을 국내 최초로 선보이면서 국내 수액사업의 기원을 열었다.
◆수액 개발 속에 담긴 혁신의 역사와 CSV 실천=초창기 수액제 생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수액을 담을 병을 구하기가 어려워 미군이 사용하던 고병을 모래, 수세미 등으로 닦아 사용했다. 이후 자동화 병을 도입했지만 이 역시 멸균과정에서 병이 깨지기 일쑤였다.

수액 생산은 철강, 화학 같은 대표적인 장치산업 중 하나이다. 이를 위해 JW중외그룹은 1964년 국내 최초로 수액제 일관 제조 시설을 도입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수액 생산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했으며, 2006년에는 1600억원을 투자해 충남 당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수액제조 전문 공장을 준공했다.
이 같은 투자와 연구개발에 대한 집념은 2013년 7월 세계 3대 수액제조 회사인 글로벌 제약사 박스터에 영양수액 '위너프'를 독점 수출하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됐다.
이는 JW중외그룹이 수액사업을 시작한 이래 56년 동안 이어온 수액 개발과 생산 경험이 축적된 결과라는 평가다.
JW중외그룹이 수액 생산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창업주 故 성천 이기석 사장의 생명존중의 가치를 강조했던 경영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적은 이익에 비해 엄청난 설비투자 등이 요구되는 수액사업은 국민 건강에 꼭 필요한 생명수를 만든다는 사명감 없이는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분야다.
이처럼 수액생산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기업의 성장을 함께 추구하는 것은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공유가치경영(CSV·기업이 수익 창출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혁신신약 개발을 향한 열정=JW중외그룹은 국내 제약사 중 가장 차별화된 글로벌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1992년 국내 최초로 해외제약사와 합작 연구소인 C&C신약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JW Theriac 연구소 등을 통해 韓-日-美 글로벌 R&D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wnt 표적항암제다. 이 약물은 암의 재발과 전이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wnt 경로를 차단하는 혁신신약으로 아직 세계 어느 제약사도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JW중외그룹이 지난 5월 29일, 제51차 미국임상종양학회(ASCO)에서 의미 있는 중간 결과를 공개하며 전세계의 높은 주목을 받았다.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와 서울아산병원 등에서 진행 중인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 대한 임상시험에서 완전관해와 부분관해 사례가 1명씩 확인되면서 세계적으로 CWP291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한 것이다.
JW중외그룹은 이번 발표를 기점으로 글로벌 제약사와의 라이센스 아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연구개발과 함께 상업화도 적극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에는 일본 바이오 기업인 프리즘 파마에 wnt 기술수출을 체결했다.
국내 제약사가 원천기술을 활용해 혁신신약 분야에서 외국 기업으로부터 자사의 특허 기술 사용료를 받은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 계약에 따라 프리즘 파마는 앞으로 일본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 신약을 팔 때 마다 계약에 따른 기술료를 지급해야한다. JW중외그룹은 앞으로도 과감한 R&D 투자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신약개발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JW =JW중외그룹은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70주년이라는 표현보다 미래 지향적인 를 선택했다. 추구하는 방향은 도전과 혁신을 담았던 초심에서 다시 출발해 70년 이후 미래를 향한 준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70주년을 맞아 JW중외그룹은 모든 임직원들에게 지주회사인 JW홀딩스 주식을 지급했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에 지급한 주식은 JW중외그룹 임직원으로서의 증표와 같은 것"이라며 "앞으로 모든 임직원들이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총력을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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