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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분쟁 투사에서 대약회장으로…김대업 다시보기

  • 강신국
  • 2018-12-17 21:31:55
  • 의약분업·편의점약 판매 관통...대약 회장 5명 밑에서 회무경력 '탄탄'
  • 분회장·지부장 경험없는 독특한 이력...정종엽 이후 24년만에 성대출신 회장
  • 가톨릭의대 3학년재학중 자퇴...성대 약대 전액장학생으로 입학

분회장, 지부장 경험 없이 첫 대한약사회장에 당선된 김대업 당선인. 한약분쟁, 의약분업, 안전상비약 슈퍼판매까지 약사사회의 굵직한 흐름속에는 늘 그가 있었다.

1964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 당선인은 부산 브니엘고등학교를 나온 뒤 1983년 가톨릭의대에 입학했다. 가톨릭대 학보사에서 활동 중이던 김 당선인은 후배기자 면접을 보던 중 같은대학교 간호대에 재학 중인 지금의 부인 양영분 씨를 만났다.

그러나 시대상황과 맞물려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었던 김 당선인은 의대 3학년 재학 중 자퇴를 하게된다. 의대 자퇴 후 군에 입대했고 4년이 흐른 1990년 성균관대 약대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때 만나 지금도 친분이 두터운 90학번 동기가 신승범, 정재영 약사 등이다.

김 당선인은 "성균관대 약대에 2등으로 입학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지금 생각하면 아주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공부 잘하는 늦깎이 예비약사였던 김 당선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안겨주는 첫 번째 모멘텀이 발생한다. 바로 한약분쟁이다. 전국약대학생협의회 대외협력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약대생들의 한약분쟁 참여를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94년 약대를 졸업한 김 당선인은 근무약사로 활동하다 한약분쟁이 정점에 다다르자 건약, 청년약사회, 약사통신, 참약 등의 연대 모임에 참여했고 여기서 상근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 조직은 '약사명예회복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명대위)로 발전했고 약사사회 개혁세력을 주도하는 인물이 됐다. 당시 김 당선인과 반목하던 정종엽 전 대한약사회장은 김 당선인에게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약사회무도 맡겼다. 김 당선인이 처음 약사회직에 들어선 계기가 됐다.

김 당선인의 개혁 노선은 계속됐다. 이른바 전직추, 즉 '전문카운터 추방과 직선제정관개정 추진모임'을 구성하며 당시 약사회 임원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이때 만난 약사들이 하성주, 정국현, 박기호, 하영환, 좌석훈, 최종수, 우창우 약사 등이다.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직추 활동 당시 김 당선인은 부천지역에 '양의 탈을 쓴 이리를 아십니까'라는 약국 전문카운터 실태를 고발하는 전단지 10만부를 일간지 신문에 넣어 시민들에게 배포했고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됐다. 김 당선인은 당시 지역약사회 임원에게 폭행까지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김 당선인은 "그때 아내가 카운터에게 맞고 왔으면 이해를 하겠는데 어떻게 약사회장에게 맞고 왔느냐는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당선인은 전직추를 이끌며 약사회관 점거 농성을 진행, 벌금 150만원을 선고 받는 등 고초도 겪었다. 소득도 있었다. 약사회장 선거가 회원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전환됐고 대의원들이 회장을 선출하는 간선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상처도 많았다. 저돌적으로 앞만 보고 가다보니 적도 많이 생기고 선배도 챙기지 않는 후배로 인식되기도 했다.

김 당선인은 "당시 이념을 우선시해 움직였다. 학교나 지연은 중요하지 않았다"며 "그래서 상처를 받은 분들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후 김 당선인의 두번째 전환점이 될 의약분업이 2000년 시작됐다. 김희중 당시 대한약사회장은 분업 이후 약국 IT가 중요해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초대 정보통신위원장에 김 당선인을 기용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36세였다.

김희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김 당선인은 PM2000 개발, 약학정보원의 전신인 약학정보화재단 설립, 표준의약품정보 등을 구축했다. 당시 김 당선인은 의약분업 의약정 협의체의 약사회 3인 대표로도 활동했다. 당시 약사회 대표에는 문재빈, 원희목 약사가 같이 참여했다.

이후 한석원 대한약사회장은 약사회 사상 첫 상근임원으로 김 당선인을 중용하고 대관, 상임위원회 지원, 사무처 관리 등의 업무를 맡겼다.

원희목 회장도 김 당선인을 기획이사로 기용하며 회무를 같이 했고 고 김구 회장 시절에는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김희중 회장부터 작고한 김구 회장까지 무려 4명의 대한약사회장과 일을 같이했다. 30대 중반 바로 대약 회무를 하다보니 그에게는 분회장, 지부장 경험이 없다.

김 당선인은 "이 기간동안 대관, 약사회 살림, 정책, IT를 알게 됐다"며 "대약일을 하다보니 지부나 분회장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밝혔다.

2012년 김구 집행부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던 김 당선인은 안전상비약 슈퍼 판매라는 거대한 파도를 만나게 된다. 당시 투쟁전략위원장이었던 김 당선인은 일반약 13품목의 편의점 판매에 대해 전향적 협의를 한 주역이라며 '매약노'라는 프레임이 늘 따라 다녔다.

이같은 프레임에 지난 2015년 대한약사회장에 도전했다가 조찬휘 회장에게 패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빅데이터 사업으로 약정원 형사재판에서 검찰 3년 구형도 받았다. 이같은 전력으로 상대 였던 최광훈 후보에게 맹공을 당했다.

그러나 김 당선인은 대한약사회장 도전 재수 끝에 당선됐고, 6년만에 약사회관으로 복귀하게 됐다. 김 당선인은 1만 9286표 중 1만1132표를 얻어 58.3%의 득표율을 당선됐다. 역대 최다 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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