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정책 3개의 레이어...권한을 알아야 문이 열린다"
- 박준섭 이사
- 2026-08-13 06:00:40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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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섭의 Between the lines
- 실무에서 경험한 제약산업 정책 3개의 지도
- 문제 해결 권한 제대로 알아야 시행착오 최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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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혁신형제약기업 인증 요건 중 R&D 투자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준비했다. 논리는 탄탄했고,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회사도 여럿이었다. 마침 혁신형 신규 지정을 앞둔 시점이어서, 이번 인증 주기 안에만 반영되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검토는 해보겠지만, 당장 반영은 어렵습니다." 명분이 분명해 보였던 그 사안은,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령에 담긴 숫자였다. 대통령령의 개정은 국무회의를 거친다. 몇 달이면 끝날 거라 생각했던 일은, 처음부터 최소 수년을 각오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장면 2
염변경 제품의 단·복합제를 같은 시점에 등재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산정 규정상 두 제품 사이에는 한 달의 시차를 두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심평원 담당자를 설득하면 풀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담당자도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저희도 필요성은 알겠는데, 저희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서요." 명분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현행 규정상 동시 등재를 허용하는 근거 자체가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근거를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존 규정을 이 사안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유권해석이 먼저 필요했고, 그 해석은 심평원이 아니라 복지부의 몫이었다. 그제서야 방향을 바꿔, 몇 달에 걸쳐 복지부를 설득하고 협의를 이어나간 끝에 유권해석을 통해 적용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후 절차에 따라 심의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동시 등재가 확정됐다.
장면 3
신약이 약평위를 통과한 후 공단과 약가·예상청구량 협상에 들어간 적이 있다. 심평원의 평가 금액이 기대보다 낮았고, 처음에는 공단과의 협상 과정에서 그 격차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서 이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심평원은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효과성 등을 바탕으로 급여 적정성과 평가금액을 검토하고, 공단은 이를 토대로 제약사와 가격·예상청구액 등 보험재정과 관련된 사항을 협상한다.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는 곳이라, 한쪽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다른 쪽에서 보정해줄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협상에서 의견을 개진해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한국 제약산업 정책의 3개 레이어
세 장면 모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디를 두드렸어야 했는지가 보였다. 그 뒤늦은 깨달음을 미리 얻을 방법은 없을까. 답은 매번 다르게 느껴졌던 이 상황들이 사실 하나의 구조 위에서 반복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제약산업 정책 이슈는 분야가 달라 보여도 하나의 공통된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크게 3개의 레이어로 나뉘고, 레이어마다 결정이 내려지는 방식과 절차,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같은 "어렵습니다"도 어느 레이어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그걸 풀기 위한 시간과 절차,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달라진다.
참고로 여기서 '레이어'라는 표현은 법적 위계를 나타내는 공식 용어는 아니다. "누가 어떤 수준의 결정을 할 수 있는가"를 실무자가 빠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이 글에서 편의상 나눈 구분이다.

핵심 포인트
레이어 1만 봐서는 약가 산정 숫자나 급여 기준 공식이 나오지 않는다. 그 공식은 레이어 2에 있다. 레이어 2를 숙지해도 협상 테이블에서 왜 그런 기준이 적용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 판단 기준은 레이어 3의 해석에 있다. 그리고 레이어 3의 해석 범위 안에서 풀 수 있는 문제를 레이어 1 개정으로 풀어야 한다고 착각하면,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던 수년 단위의 과제를 스스로 만드는 셈이다.
레이어는 곧 판단의 지도다
레이어가 다르면 그 문제를 바꾸는 데 필요한 절차와 시간도 함께 달라진다. 아래 표는 레이어별로 결정이 내려지는 단위와, 그에 따르는 절차·소요 시간을 일반적인 경우를 기준으로 대략 추정한 것이다. 사안의 성격이나 시점에 따라 실제 소요 시간은 달라질 수 있다.

참고 사례
산정률 45%로 인하하는 내용을 포함한 이번 약가제도 개편안의 경우, 2025년 11월 28일 발표 후 시행(2026.8.1)까지 약 8개월이 걸렸다. 이는 방향이 정해진 이후 절차에 소요된 기간일 뿐이다. 착수와 협의를 거쳐 안이 확정되기까지의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전체 소요 시간은 이보다 길어진다.
자주 생기는 착시
레이어 3은 기관별로 소관이 명확하게 나뉜다. 앞서 본 장면처럼 심평원과 공단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는 기관이지, 한쪽이 다른 쪽의 결정을 다시 검토해주는 상하 관계가 아니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이미 정확한 답을 준 곳에서 다른 답을 다시 구하려는 시도가 반복된다. 선별급여 품목 하나를 두고도 이 구분은 그대로 적용된다. 임상 재평가 결과에 따른 급여 유지 여부는 심평원의 몫이고, 임상 실패 시 청구된 환자 부담금을 환급하는 계약 조건은 공단의 몫이다. 같은 품목을 다루는 사안이라도, 문의할 곳은 완전히 갈린다.
업무의 성격이 레이어를 정한다
결국 어느 레이어에 속하는 문제인지는, 그 업무가 요구하는 변화의 성격이 정한다. 요청하는 것이 "기준 자체를 바꿔달라"는 것인지,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지 해석해달라"는 것인지에 따라 출발선이 달라진다.
혁신형제약기업 인증의 R&D 투자 비율 같은 숫자 자체를 조정하는 일은 시행령 개정이 필요한 레이어 1의 사안이다. 제네릭 산정 비율이나 가산율처럼 약가를 계산하는 공식 자체를 바꾸는 일은 고시 개정이 필요한 레이어 2의 사안이다. 이미 정해진 산정 기준이나 급여 기준을 우리 제품·사안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확인하는 일은 심평원·공단의 해석이 이루어지는 레이어 3의 사안이다.
같은 복지부 소관 업무라도 변화의 성격에 따라 확인해야 할 규정과 절차, 예상해야 할 시간은 달라진다.
움직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을 것
새로운 이슈가 생겼을 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이 세 가지만 먼저 짚어보면 출발선이 훨씬 정확해진다. 첫째,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기준 자체를 바꿔달라는 것인가, 아니면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지 해석해달라는 것인가. 둘째, 그 요청에 답할 권한을 실제로 가진 곳은 어디인가. 셋째, 그 레이어가 원래 요구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다
이 업무가 요구하는 변화가 어느 레이어의 몫인지를 아는 것.
이 판단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같은 사안도 시점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읽혀서, 그 정확도는 이 일을 오래 지켜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쌓인다.
그리고 이 판단은 실무자 혼자만의 몫으로 끝나지 않는다. 레이어를 정확히 짚어 전달하면 회사 안의 논의와 정부와의 대화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반대로 흐릿하게 전달되면, 기대하는 책임과 시간이 서로 어긋나고, 그 어긋남은 결국 회사도 정부도 함께 지치게 만든다.
레이어를 짚는 일은 어디에 있는 문인지를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문을 통과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아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급한 사안이라도 그 문이 원래 요구하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앞서 세 장면에서 헤맸던 시간도 결국 정확한 문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그 문을 찾고 나서야, 당장 풀 문제인지 시간을 두고 풀어갈 문제인지도 비로소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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