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100년의 버팀목…'소유-경영' 분리가 이끈 혁신
- 차지현 기자
- 2026-06-17 06: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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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 100년]②유한양행, 1936년 종업원 지주제 도입·제약업계 최초 상장
- 유일한 박사, 보유 주식·재산 사회 환원…1977년 유한재단 체제 제도화
- 유한재단, 유한양행 지분 15% 보유 최대주주…소유와 경영 분리 공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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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팜=차지현 기자] 유한양행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36년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고 1962년 제약 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했다. 1969년에는 창업주 일가가 아닌 내부 출신 인사에게 경영을 맡기며 전문경영인 체제를 열었다. 이후 국내 첫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 항암신약까지 탄생시켰다. 그야말로 한국 제약산업의 변화를 앞장서 이끈 기업이다.
이 같은 성과의 비결은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지배구조에 있다. 유한양행 최대주주는 창업주가 보유 주식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만든 공익법인 유한재단이다. 재단은 회사 지분을 장기 보유하되 일상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로써 안정적인 지배구조 아래 장기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이어가는 동시에, 기업의 성장 과실을 다시 사회공헌에 투입하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았다.
기업은 사회의 것…주식과 경영권 내려놓은 유일한 박사
유한재단의 뿌리는 유한양행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가 1965년 출연해 조성한 유한교육신탁기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 박사는 평생을 바쳐온 교육·장학사업과 사회원조사업을 영속적인 제도로 정착하기 위해 1970년 개인 주식 8만3000여주를 기탁해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공식 발족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창업주가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유 박사는 기업을 가족의 재산이 아닌 사회의 자산으로 봤다. 회사에서 얻은 부와 성과 역시 후손에게 남기기보다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 박사의 이런 철학은 1971년 별세 후 공개된 유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 박사는 장남에게 "대학까지 공부시켰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살아가라"는 뜻을 남겼다. 어린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필요한 학자금 1만 달러만을 지원하도록 했다. 외동딸 유재라 여사에게 맡긴 유한공고 주변 토지 5000평 역시 개인 재산으로 사용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유한동산'으로 조성하도록 했다. 가족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만 남기고 나머지 재산을 사회에 귀속한 것이다.

유 박사가 생전 공익기관에 출연한 개인 주식은 당시 유한양행 발행주식의 40%에 달한다. 기업 이익 일부를 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사의 소유권 자체를 공익 영역으로 옮겼다는 데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창업주의 뜻이 후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재단의 지속 가능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상징성이 크다.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1977년 공익법인 관련 법률에 따라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전환됐다. 보유 주식 일부는 교육사업을 담당하는 유한학원과 나눴다. 기업은 유한양행이, 공익사업은 유한재단이, 교육사업은 유한학원이 담당하는 사회환원 체계가 갖춰졌다.
이후 유 박사의 뜻은 외동딸 유 여사에게로 이어졌다. 유 여사는 1977년부터 유한재단 이사장을 맡아 장학·복지사업을 이끌었고 1991년 별세를 앞두고 당시 시가 200억원 상당 전 재산을 재단에 기증했다. 이후 유 박사 여동생이자 간호계 원로인 유순한 여사와 유한양행도 주식과 재산을 추가로 출연했다. 창업주 한 사람의 결단에서 시작된 사회환원 정신이 가족과 회사로 이어진 셈이다.
국민 건강이 먼저…'건강입국'에 바친 독립운동가의 뚝심
유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6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 유기연의 영향으로 일찍이 개화사상과 나라 없는 민족의 현실을 접했다. 아홉 살이던 190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네브래스카주에서 생활했고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이후 미시간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신문 배달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했다.
낯선 땅에서 학업과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지만 조국 독립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유 박사는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결의문 작성과 낭독에 나섰다. 대학 졸업 후에는 식품회사 라초이를 세워 사업가로 성공을 거뒀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926년 유 박사가 귀국했을 당시 식민지 조선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의약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유 박사는 '건강한 국민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주권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업을 선택했다. 같은 해 12월 서울 종로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 박사는 초기 미국 의약품 공급을 시작으로 자체 생산과 제품 개발로 사업을 넓히며 기업을 통해 국민 건강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철학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유 박사가 세운 경영 원칙은 분명했다. 기업은 개인과 철저히 분리돼야 하며 투명경영과 성실납세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 그는 정실인사를 배격하기 위해 가족과 관계마저 엄격하게 구분했고 경영은 혈연이 아닌 능력과 책임에 따라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철학은 1936년 종업원 지주제 도입으로 구체화됐다. 유 박사는 개인기업이던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임직원에게 회사 주식을 나눴다. 창업주와 가족이 회사 주식을 독점하던 당시 관행과 달리 종업원을 피고용인이 아닌 기업의 공동 소유자로 참여시킨 것이다. 기업 성장의 과실을 구성원과 공유하는 동시에 창업주 개인에게 집중된 소유권을 분산한 조치였다.
종업원 지주제는 일회성 조치에 머물지 않았다. 유한양행은 1973년 이를 사원지주제로 공식화하고 직급과 근무연한을 기준으로 직원들에게 주식을 배분했다. 이듬해에는 6만7500주를 추가 배정하며 직원의 경영 참여 기반을 넓혔다. 이에 따라 직원의 경영 참여와 성과 공유를 뒷받침하는 틀이 갖춰졌다.
인사에서도 혈연과 연고보다 능력과 전문성을 우선했다. 유한양행은 1957년 제약업계 최초로 사원을 공개 모집하고 의사·약사에게 의약품 정보를 전문적으로 전달하는 '디테일맨' 제도를 도입했다. 공개채용으로 선발한 9명에게 한 달간 제품과 약리 지식, 영업윤리 등을 교육한 뒤 현장에 배치했다. 연고가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원칙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소유 분산은 1962년 기업공개로 이어졌다. 유한양행은 자금 조달이 시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국내 제약사 가운데 처음으로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주주가 늘어나면 경영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내부 반대가 있었지만 유 박사는 기업이 한두 사람의 손에 머물러서는 장기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종업원에게 나눈 소유권을 일반 투자자에게까지 확대하면서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한층 강화했다.

1969년에는 경영권도 혈연에서 떼어냈다. 유 박사는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장남 유일선 씨를 비롯한 친인척을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게 하고 평사원으로 입사해 내부에서 성장한 조권순 전무에게 사장직을 맡겼다. 창업주가 생전에 가족 승계를 포기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공식화했다는 얘기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이후 유한양행 경영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유한양행 역대 대표이사 대부분이 공채로 입사해 회사 내부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들이다. 사장 임기는 3년이며 한 차례 연임을 포함해 최대 6년으로 제한된다. 내부 승진을 통해 경영의 연속성을 유지하되 특정 경영인에게 권한이 장기간 집중되는 것을 막는 구조다. 종업원 지주제와 기업공개로 소유를 분산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경영권을 분리한 뒤, 재단에 지분을 귀속하며 현재의 지배구조가 안착한 것이다.
최대주주는 재단, 경영은 전문경영인…유한양행 100년 지킨 분리 원칙
유한재단은 3월 말 기준 유한양행 지분 15.9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유한재단의 성격은 일반 기업의 최대주주와 다르다. 재단법인은 주식회사가 아니어서 재단 자체를 소유하는 개인 주주가 없다. 특정 개인이나 가족이 재단 지분을 보유하거나 재단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다. 유한재단이 보유한 유한양행 주식과 여기서 발생하는 배당수익의 최종 수혜자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유한양행의 경우 유한재단이 창업주 일가의 지배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제약사 공익법인과 차별화된다.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주요 상장 제약사 16곳 산하 공익법인 21곳 가운데 20곳이 제약사나 지주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또 15곳 제약사에서 창업주나 오너 2·3세, 배우자 등 오너일가가 이사장 또는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대웅재단과 JW이종호재단, 가송재단 등은 오너 2·3세가 직접 이사장을 맡고 있다. 녹십자그룹과 광동제약, 동아쏘시오그룹 산하 재단에도 오너 후계자가 이사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재단 보유 지분이 오너일가 개인 지분과 결합해 그룹 지배력을 보완하는 구조다. 한미약품그룹의 경우 가현문화재단과 임성기재단이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특정 주주 측 우호지분 역할을 하면서 공익법인 의결권 행사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반면 유한재단 이사회에 창업주 후손이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재단 보유 지분이 창업주 일가의 개인 지분과 결합돼 경영권을 뒷받침하는 방식과도 거리가 멀다. 현재 유한재단은 원희목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 10명과 감사 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유한양행 전·현직 경영인은 이정희 이사와 조욱제 이사 2명이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재단과의 연결 역할을 맡되 외부 인사가 이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형태다.
재단 수장도 유한양행 퇴임 경영진이 관행적으로 이어받지 않는다. 유한재단은 2004년 제5대 한배호 이사장 이후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한승수 전 국무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를 거쳐 원희목 이사장까지 6대 연속 외부 인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회사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사장직을 창업주 일가나 특정 경영인의 영향력 아래 두지 않는 운영 원칙을 이어온 것이다.

이 같은 지배구조는 '사람 중심 경영'이 뿌리내리는 토양이 됐다.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100년 동안 한 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은 적이 없다. 전국적으로 노동 운동과 노사분규가 폭발했던 1987년 단 한 건의 탄압이나 갈등이 없었으며 IMF 외환위기(1998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9년) 같은 거대 경제 위기 속에서도 고용 조정 없이 노사 대타협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다.
직원을 기업의 공동 주체로 보는 경영 기조 아래, 회사 내부에서 경영진과 직원을 사용자와 노동자로 구분하는 '노사'(勞使) 대신 모두가 함께 일하는 구성원이라는 의미의 '노노'(勞勞) 정신을 강조해온 영향이다. 2025년 기준 임직원 평균 근속연수는 12년8개월에 달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경영 안정뿐 아니라 구성원의 장기근속과 조직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익법인이 최대주주로 자리하고 전문경영진이 독립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지배구조는 혁신 신약개발의 기반으로도 작용했다. 구성원의 장기근속이 연구 경험과 전문성의 단절을 막고 조직 내에 축적되면서 유한양행은 긴 시간이 필요한 신약개발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다. 경영진도 특정 개인의 이해나 단기 실적 압박보다 회사의 장기 전략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내렸다.
유한양행의 지배구조는 공익재단이 기업의 장기 주주로 자리하는 덴마크 산업재단 모델과 닮았다. 전 세계를 뒤흔든 비만 치료제 '위고비'를 개발한 덴마크 노보노디스크는 노보노디스크재단이 지주회사 노보홀딩스 지분 100%를 보유하고 노보홀딩스가 노보노디스크와 노보네시스의 지배주주로 참여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노보홀딩스는 두 회사의 의결권 70% 이상을 확보해 안정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는 한편 배당과 투자수익을 생명과학 연구와 대학·병원 지원, 바이오기업 투자에 다시 투입한다. 노보노디스크가 창업주 일가의 세대 승계나 지분 매각 부담 없이 장기 연구개발과 산업 생태계 투자를 이어갈 수 있는 배경이다.
유한양행 역시 덴마크 못지않게 일찍이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하는 거버넌스 기틀을 완성한 셈이다. 재단은 안정적인 최대주주 역할에 집중하고 경영진은 정해진 임기 안에서 사업 성과를 책임지는 체제 덕분에 유한양행은 창업주 일가 상속이나 경영권 분쟁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 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창업주가 남긴 청지기 정신과 유한재단은 유한양행이 '오너 없는 회사'로 한 세기를 버티고 혁신 신약 성과까지 일군 핵심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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