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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못할 풋내기 영업사원의 1년

  • 데일리팜
  • 2001-12-24 22:54:00
  • 요약

새로 발령받아 온 부서에서 일한 지 채 두 달이 안된 시점 탓일까. 지난 10개월의 영업 경험을 분명 길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매사가 새롭고 어려우며 낯선 상황들로 가득했던 사회초년병으로서, 지난 시기는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의미 있는 경험들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

그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늘처럼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1년 전 이맘때쯤, 나 또한 누구나처럼 어렵사리 입사를 했고, 그 기쁨에 못지 않게 사회라는 낯선 세계로 첫발을 내딛으며 그 이상 더 큰 두려움에 휩싸였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전공했던 과의 특성상, 농구나 스키를 즐기기보다는 파묻혀 시집을 읽는 게 더 좋았던 샌님(?)였으니, 과연 그 거칠다는 영업이란 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그리고 그 우려는 처음의 영업 활동에 꽤나 상당부분 적중하고 말았다. 약에 대한 디테일링은 그렇다 치더라도, 회전일, 에누리, 여신 등의 의미파악이 남들보다 뒤늦는 것만 같아 초조한 날들만 한동안 계속되었다.

처음 출장 나갔던 때가 생생하다. 자신감을 가지고 어느 소아과 앞에 섰으나, 결국 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슬그머니 도망치듯 나와 우두커니 거리에 서서 30분간 줄담배만 피워댔던 기억.

그 첫 거래처에서의 무한한 떨림을 과장님은 잘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당신의 첫날을 회상하면서, 고생했다며 내밀어주시는 박카스 한 병이 어찌나 고맙던지. 이후 박카스를 하루에 몇 병이고 비우는 진정한 팬이 되면서 새로이 알게 되었다. 박카스에 대한 어떤 종류의 애정이던 그 어떤 특별한 계기이자 추억을 데불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수백 병을 비우고, 봄날은 가고, 가로수마다 신록으로 불타오르는 여름이 오면서 조금씩 내 안에도 뜨거운 어떤 것이 뭉치어 잡힐 듯 하였다. 박카스 한 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듯, 결국 내 조그마한 정성으로나마 진정 만나고 싶은 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영업이란 것이 목표에 둔 바를 얻어내기 위해 무제한으로 열려진, 즉 정답 없는 접근기술이자 암중모색의 가능성이라면, 정답은 없지만 주어지는 문제만큼은 언제나 마음에 대한 것임을 차차 깨달아가게 된 셈이랄까.

사람이 만나고 싶었다. 목표에 앞서 먼저 사람을 대한다고 느낄 때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넉넉히 남는 그 무엇이 있었다. 약소한 것이지만 사탕 하나, 말 한마디라도 정성스레 준비해 갈 때면 거래처는 별반 어김없이 마음을 열어 보여 주었다.

조그맣더라도 밀도 있는 정성과 인간미. 이건 선배들이 누누이 강조하던 바이기도 했다. 그런 선배들의 묵묵한 실천을 보면서 그들이 일개의 보이지 않는 영업사원일지 모르나 날이 갈수록 존경스럽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쉽게 움직이는 그 대단한 선배들이 나처럼 풋내기 신입사원 시절엔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어느 날 회식 자리였던가. 영업부서의 특성상, 서로 술잔을 수없이 돌리며 취해갈 때쯤이면, 어김없이 선배들의 격려와 어머니 같은 훈훈하고도 세세한 충고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날 옆에 앉아 있던 분은 우리 지점의 종합병원팀장이셨다. 한때 오랫동안 서울대병원을 담당하셨으니 영업에 관해선 경지에 오른 분으로, 신출들에겐 외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의 말씀은 그날 따라 당신의 신입사원 시절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업사원들이 그렇듯, 언제나 적극성과 넉살 좋은 웃음으로 내게 툭 던지는 그분의 말에 순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너, 내가 입사 때도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었는 줄 알어?"

대학시절만 해도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영업을 잘 할 수 있을 지 고민되었다는 회상이 곧 뒤를 잇는다.

사람의 성격 또한 환경이 만드는 법이라며, 영업 덕에 이처럼 담대하고 긍정적이며 추진력 있는 성격으로 변할 수 있었다는 흰 머리 선뜻선뜻한 중년 신사의 멋진 육성고백이라니!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사뭇 많이 변해있지 않은가. 200여 군데의 병원과 50군데 이상의 약국을 수없이 드나들면서 상대한 무수한 사람과 상황들. 천차만별의 성격들과 조우하면서 좀더 둥글둥글하고 넉살 좋아진 내 모습이 순간적으로 감지된 신기한 술자리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에게 치여 상처받는 직종이 영업이라지만, 그 단련의 세월을 거치면서 얻어 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겸손미는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 존경했던 어느 철학과 교수님이 강의 중에 하신 말이 떠오른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주변 사람 몇몇이나마 바꿀 수 있다면 실로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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