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2주년...동화약품 "애국 애족 110년"
- 가인호
- 2007-08-15 10: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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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주 포함 역대 사장 3명 독립운동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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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2주년을 맞아 동화약품의 자주 독립 정신에 힘썼던 기업 이념이 재조명 받고 있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창업주 포함 역대 사장 3명이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윤추구보다는 애국, 애족정신으로 110년 역사를 펼쳐왔다는 것. 
창업주를 포함한 역대 사장 3명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 회사 내에 상해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기관이 존재했고 독립자금을 지원한 점 등이 이를 증명해 준다고 회사측은 설명하고 있다.
구한말(1897~1909), 일제시대(1910~1945), 무질서와 혼란의 해방(1945~1949), 6.25전쟁(1950~1953), 4.19의거(1960), 5.16 군사혁명(1961), 광주 민주화 운동(1980) 등 현대사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속에서 110년이라는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대 동화약품 경영자들의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동화약품측은 "동화약품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민족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긍지로 국내 기업사의 전무후무한 110년 역사를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동화약품의 초대사장인 민강(1883~1931)선생은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당시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조직인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대동단은 제1차 행동으로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탈출은 압록강 건너 안동역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대동단 간부는 거의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민강 사장도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민강 사장이 옥고를 치른 후 동화는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감시원이 필요한 양의 약품을 무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규정한 ‘약품 및 약품 취체령’에 따라 검사 또는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약을 마음대로 빼앗아 가기도 때문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기간 중 동화에는 비밀리에 서울연통부(聯通府)가 설치되었다. 서울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비밀연락 행정의 첫 조치로서 국내와 국외를 연락하는 방법으로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서울에 설치한 비밀 행정부서였다. 이 연통제는 국내 각 시, 도, 군, 면까지 조직을 갖추고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연통부 활동은 1922년 일제에 의해 전국의 여러 조직이 적발되어 주춤하게 되었다. 이 같은 활동을 기념하여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 본사 부지에 연통부 기념비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한 뿌리깊은 민족임을 널리 알렸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으로 수 회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1월 4일 건강악화로 별세하였다. 그는 한국약업계의 선각자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였다. 대한민국 건국 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3월 1일자로 건국훈장 독립장(훈기번호 000242)을 수여했으며,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동화약품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5대 사장 보당 윤창식(1890~1963) 선생은 1890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나 뒤늦게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응키 위해 보성고등보통학교 및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상과에 입학, 신학문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치하에 이 겨레의 자주경제의 발전을 위해 국산품 애용을 장려할 목적으로 1915년 3월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조직체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 총무에 피임되어 육당 최남선, 최규익 등과 함께 민족혼을 고취하고 국산품 애용운동을 펴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독립운동 국내기간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의 간부로서 조국광복운동에 힘쓰는 한편 1937년에는 민족보건산업의 육성을 위해 당시의 동화약방을 맡아 사명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개명하고 현대적 기업으로 발전시켰다. 1945년 해방뒤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서울시의원과 숙명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과 자선사업단체인 보린회(保隣會) 창립자 등 여러 직책을 맡아 교육에도 힘썼다. 또한,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유훈를 남겼으며, 이러한 윤창식 사장의 경영철학은 후대 경영자들에게도 이어져 동화약품 경영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보당 윤창식 사장은 민족기업가의 뜻, 즉, 민족기업을 “우리의 자본으로, 우리의 제약기술로, 우리의 노동력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영세 중소기업 민족자본을 육성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민족기업가적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다. 윤창식 사장의 대를 이어 윤광렬(1924~ ) 現회장도 광복군으로 활동했었다. 윤회장은 유년시절부터 선친의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 지켜보면서 애국, 구국정신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실천하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재학중 1944년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지만,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하자마자 탈영하여 자발적으로 상해에 있는 정부군을 찾아가 주호지대(駐戶支隊) 광복군으로 편입돼 5중대 중대장직을 맡았다.
동화약품 사장출신 독립운동가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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