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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한국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을 위하여

  • 안경진
  • 2017-04-03 06:14:50

올해 초 인상깊게 본 영화가 있다. 지난해 12월 개봉했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는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뺏어가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영국의 복지제도를 꼬집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40여년간 목수로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 악화로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진단을 받지만, 돌연 상병수당 지급이 중단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노동이력이 증명되지 않아 상병수당을 지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2가지로, 심정지 위험을 안고 근무를 지속하면서 상병수당을 받거나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구직활동을 증명하는 것이다. 통화요금마저 부담인 그는 사회보험 상담을 받기 위해 50여 분의 통화 대기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어렵게 통화가 성사되더라도 기계적인 절차만 반복될 뿐, 정작 원했던 내용의 상담은 받을 순 없었다. 겉보기에 팔다리가 멀쩡한 다니엘이 일하지 않으면서 상병수당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은 영국 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담센터를 직접 찾아가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기조차 어려운 60대 노인에게 온라인을 통한 실업급여 신청이 가능하기나 할까.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며 항변을 이어가던 그는 항고심사 직전 심장발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영화는 항고심사에서 읽으려던 그의 주머니 속 편지로 끝을 맺는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다큐멘터리로 오해할 만큼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 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복지제도가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 어느나라보다 건강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신약이 시판허가를 받은 뒤 급여권에 진입하기까지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물론 악명 높기로 유명한 미국의 건강보험제도와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보장성은 월등하다. 정부가 제한된 예산으로 보건의료서비스를 운영하는 단일보험(single payer) 제도의 특성상 분배정책에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데도 공감한다. 하지만 대안이 있음에도 치료비 부담 때문에 약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부담감을 지워버릴 명분으론 부족할 것이다.

지금 국내 폐암 환자들의 관심은 4월 6일로 예정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 결과에 집중되고 있다. 다행히도 약평위 상정 여부를 놓고 한바탕 진통을 겪었던 면역항암제 2종(키트루다, 옵디보)은 상정이 확정됐다고 전해진다. 급여 적정성 평가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그간의 논란과 고비용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성과다. 반면 기존 표적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EGFR T790M 변이양성 비소세포폐암 환자 대상의 3세대 표적항암제, 타그리소와 올리타는 끝내 이번 약평위 안건으로 포함되지 못했다. 각각 경제성평가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감사 결과가 확보되지 못한 탓이다.

완벽한 제도란 존재할 수 없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건강보험료로 투입한들 의료현장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겠냐만은, 요즘처럼 그 영화 속 메시지가 절절하게 다가올 때가 있을까.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다수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을 위해 정부기관과 학계, 산업계가 부디 운영의 묘를 발휘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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