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약 대체청구 문제로 전국 약국이 긴장하고 있다. 비싼 오리지널 약 처방을 환자와 의료기관 동의없이 싼 약으로 대체조제한 뒤 원래의 약으로 청구해 차액을 챙기는 이른바 '약 바꿔치기' 점검에 대부분의 약국이 휘말린 것이다.
이번 조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전국 2만1000여곳을 전산전검하는 과정에서 무려 1만8000여곳이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약국 10곳 중 8곳 이상이 사정권 안에 들면서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 것이다.
"불가피한 대체조제였는데"…일괄 포함에 약국가 '혼란'
당초 공급실적-약국 청구 불일치 조사는 저가약으로 조제한 뒤 비싼 약으로 청구하는 수법으로 약값을 부풀려 차액을 챙기는 불법행위 근절을 위해 기획됐다.
그러나 이번 청구 불일치 판정을 받은 약국들의 갖가지 사례들 속에는 약국에서 흔히 벌어지는 단순 과실이나 행정처리 미흡 수준까지 모두 포함됐다는 점에서 약사사회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 공급내역-청구 대조 결과의 예.
예를 들어 흔히 처방되는 항생제 오구멘틴정(사입가 353원)을 사입한 적 없는 약국이 지속적으로 조제 내역을 청구하고 있지만, 이 약국에서 꾸준히 사입해 온 약은 아목타심정(159원)이라면 이 약국의 고가약 불법 대체청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 심평원의 판단이다.
소아과 처방의 경우 정제를 갈아서 조제하는 경우가 빈번한 특성상 불법 대체청구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업체 공급내역보고와 약국 의약품 사입 종류와 청구량까지 비교·대조하면서부터 개연성을 가름할 수 있게 됐다.
여기서 약국의 불가피한 상황과 행정처리 미흡 등 과실까지 포함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A약사는 금요일 밤, 단골환자로부터 팜빅스(단가 5734원)가 처방된 처방전을 한 장 받았다. 환자가 편의상 원거리 처방전을 갖고 밤에 약국을 찾은 것인데, 마침 이 약국에는 팜클로정 밖에 없었다.
A약사는 환자를 차마 돌려보낼 수 없어 성분·함량·제형이 같은 팜클로정(단가 3036원)으로 조제했지만, 이후 여러 처방전을 몰아서 청구하는 통에 무심코 팜빅스로 청구했다가 불법 대체청구로 낙인찍히게 됐다.
이 약사는 "의료기관 문도 닫고 팩스 발송도 소용없는 데 대체조제를 의료기관에 알리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며 "약국 마감 전 몰아서 청구하다가 나온 실수였다"고 당혹감을 드러냈다.
심평원, 악성 약국 1830곳 현지확인 가닥…서면조사 우선시행 타진 중
의사와 환자 동의 없이 싼 약으로 대체청구한 후 원래대로 고가약으로 청구하는 사례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조사의 대부분은 제보에 의존해 적발률이 두드러지진 않았었다.
그러다가 2008년 심평원 내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가 설립된 후 제약사와 도매업체가 판매실적을 보고하는 공급내역보고 체계가 자리잡으면서 이에 약국 청구 내역을 비교, 대조하는 데이터마이닝 기법이 개발돼 불법행위 적발이 손쉬워졌다.
의약품 공급업체들의 경우 보고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착오기재도 처분 규정을 엄격히 하면서 오류율을 급격히 감소시켜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공급내역보고 미흡 또는 허위에 의한 약사법상 처벌규정이 적게는 15일에서 많게는 6개월까지 영업정지로 이어지고 정정보고 기간을 두고 있다는 것이 심평원 측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 4월 12개 약국 서면조사에서 청구 불일치 대상 약제 240품목 중 공급내역 오류로 나타난 건은 단 6개로, 코드변경 등에 의한 사유였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는 공급내역보고와 청구내역 대조 시 불일치 데이터의 거의 대부분은 약국 청구 오류 또는 잘못된 대체청구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현재 심평원은 적발된 1만8000곳 중 불법과 고의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약국 1830곳을 추려 복지부령에 따라 현지확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조사도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다만 업체 공급과 약국 사용시점 간 차이와 재고약 소진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 없는 문제는 일정부분 분석의 한계로 인식돼 왔다.
심평원 관계자는 "첫 조사를 벌일 때 이 부분에 대해 장시간 고민했지만 사전에 보고시점과 청구시점, 재고 등을 전산상 보정하는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실제 정확도는 100%에 가깝다"고 부연했다.
현재 심평원은 불법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약국들을 선별해 현지확인 및 현지조사 등을 벌이는 한편, 나머지 약국들은 서면조사를 통해 소명을 받거나 차액을 환수하는 '투트랙'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가닥잡았다.
적발된 1만8000곳 중 고의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약국 1830곳을 추려 현지확인 작업을 진행한 뒤 추가소명을 거쳐 수위에 따라 부당금액 환수와 과징금 최대 5배 환수, 면허정지 등 건보법에 따른 행정처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심평원은 대상 약국이 2000곳에 달하는 만큼 현지확인 기간을 1년으로 잡고 진행할 계획이다. 다만 정확도와 현장 투입 인력의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이들 약국도 예비조사 성격의 사전 서면조사 과정을 거칠 지 검토 중이다.
그 외 나머지 약국들은 6월 안에 서면조사와 소명을 통해 환수 등 처벌수위를 가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심평원은 명백한 불법 대체청구부터 고의성이 의심되는 장기 대체청구, 대체조제 사후통보 또는 의사 사전동의와 연관된 문제와 단순 청구오류, 무자료 거래 중 약국 간 교품거래, 폐업약국 약 인수 등 유형을 구분해둔 상태다.
단순과실이 많은 만큼 고의성과 편취 규모를 기준으로 행정처분 수위를 가름하겠다는 것이다.
약사회 대응 마련 분주…"단순·착오 구분해 반드시 구제할 것"
▲ 한 구약사회 주최 고가약 대체청구 설명회에 참석한 약사들.
이번 사태로 약국가의 긴장이 극에 달하고 있는 가운데 약사회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약사회는 정황이 뚜렷하게 입증된 불법 대체청구에 대해서는 근절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실수를 피력하며 선처를 호소하는 상당수 회원 약국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약사회 관계자는 "그간 약국에서 무심코 처리해왔던 청구 행정업무들에 대한 과실이 공급내역 대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울러 "의도성이 명확한 약국을 배제한 나머지 약국들은 심평원 확인 대상에서 걸러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일부 구단위 약사회에서는 심평원에 소명할 수 있는 절차와 방법, 이 과정에서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는 공개설명회도 마련하는 상황이다.
이 관계자는 "사입 근거를 입증할 거래명세서 보관이 필수지만 그렇지 않아 소명이 힘든 상당수 동네약국들이 선처를 호소하고 있어 심평원에 이들의 단순 과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